나이를 한살 두살 먹어갈수록 세월이 빠르다는 걸 절실히 느끼는데 이것 참 허무감입니다. 더군다나 요즘 일이 바빠 영화관을 찾는 일마저 줄었습니다. 당연히 안본 영화들이 수두룩하죠. 가장 최근에 본 작품이 인셉션(Inception, 2010)이군요. 내가 하는 일이 영화쪽과는 무관한지라 가끔 그게 뭐 대수냐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영화라는 게 내 인생에 있어 마치 오랜 친구와 같아 여간 아쉬운 게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어릴 적 부모님과 누나들 뒤를 졸졸 따라가서 구니스(The Goonies, 1985)를 감상한 게 내 영화관 첫 출입이였네요. 이젠 그 영화의 내용도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생전 처음보는 거대한 스크린에서 영상이 흐르던 그때의 놀라움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이후 시간이 지나 머리가 커지기 시작할 때부턴 보고싶은 영화는 혼자서 어떻게든 영화관에 들어가고자 무던히 애를 쓰던 적도 많았는데요. 그 당시엔 지금과는 수준이 약간 떨어지는 관람객 관리 시스템 덕분에 영화가 다 끝나도 건물 밖을 나오지 않고 안에서 시간 때우다 다음 상영이 시작되면 몰래 빈자리를 찾아 다시 봤던 적도 꽤 많았습니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만석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가능했으니 이건 뭐 영화 좋아하는 나에겐 천국이나 다름 없었죠. 돌이켜보면 시간 정말 빨리 지나갔습니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런 저런 어렸을 때의 아련한 추억들... 정말 돌아가고픈 간절한 시간들이에요.
위 스틸샷은 자크 베케르 감독의 1960년작 '구멍(Le
Trou / The Hole)이라는 작품입니다. 꽤나 오래된 작품이죠? 그러나 영화의 재미마저 낡고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전 이
영화를 어릴적 EBS채널에서 처음 봤는데요. 흑백으로 이루어진 영상이지만 전체적으로 밝은 톤에다 탈출이라는 흥미로운 소재에 끌려
나름 푹 빠져 봤던 기억이 나네요. 훗날 다시 이 영화를 찾으려 했지만 제 능력으론 구하기가 어려워 EBS측에 직접 전화를 걸기도
했었죠. 아마도 대학교 1학년 때가 아니였나 싶네요. 어느 남자분이 전화를 받으셨는데 제 기억에 그 프로의 담당자는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해선 잘 알고 계시더군요. 전 단도직입적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영상을 따로 보내주지는 못하고 대신 기회가 된다면 EBS에서 꼭 다시 방영을 할테니 그때를 기다려달라더군요. 그러면서
관심가져줘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 그의 말대로 한동안 EBS채널의 편성표만 줄창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군대를 갔다오고 학교를 복학하고 이런 저런 일에 치여 살면서 그 영화는 그렇게 잊혀져갔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내 기억에서
떠나있었으므로 그 사이 EBS에서 이 영화를 재방영해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이어린 학생의 전화를 친절히 받아주고 끝까지 말을
들어주신 그 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즐거운 기억입니다. 좋아하는 작품 하나 때문에 방송국에 전화도 걸고
매주 편성표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 때가 말이죠. 요즘엔 뭐 이럴만한 일들이 통 생기질 않네요. 지금 제 자신을 돌이켜봐도
그때만큼의 열정(?)도 없는 듯 하구요.
말 이 길어졌네요. 영화 이야기만 하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쓰다보니... 이 영화는 '탈옥'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탈옥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지금껏 긴 세월을 두고 꾸준히 만들어져 왔는데 이 영화는 결말부분에서 대다수의 탈옥 영화들과는 다른 길을 걷습니다. 왜냐구요? 어렵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단 탈옥에 실패하거든요;;; 그러면서 영화도 그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 당시 긴 러닝타임인데도 그렇게 엔딩 스크롤이 시작되자 당황했던 기억이 나네요. 허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사실 전 이 결말이 더 맘에 듭니다. '알카트라스 탈출(1979)'이나 '쇼생크 탈출(1994)'식의 이야기도 좋지만 제 개인적으론 이 영화의 결말이 보다 현실적이고 살에 와닿는 느낌이에요. 뭐 필요 이상으로 맥 빠질 일 없습니다. 솔직히 이 또한 현실 아닙니까? 이들이 그토록 원하던 삶, 그토록 원하던 꿈을 위해 죽도록 노력하고 이제 겨우 결실을 맺나 싶더니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어떠한 상황에 의해, 사람에 의해 한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과한 표현일지 몰라도 이렇게 인생 속 일장춘몽(一場春夢)을 솔직하게 보여준 영화도 드물 듯 싶네요.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억압이 심한 곳 중의 하나인 교도소를 상대로 각자의 에피소드를 엮어 탈옥을 준비함으로써 삶을 위한 투쟁이자 저항을 합니다. 물론 '탈옥이 불법일 수만은 없다.'라는 점까지 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일련의 과정들이 그 주제로서는 매우 매력적이자 재미있는 요소 아니겠습니까? 이 영화는 또 결말에 대한 강렬함에 앞서 탈옥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 어떤 영화보다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보여주는데요. 처음 바닥을 깨부술 때부터 탈옥 바로 직전까지의 이들이 보여준 행동엔 보는 이로 하여금 한순간이라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과 함께 그 위에 소스처럼 곁들여진 이들의 동료애는 남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요. 정확하게는 동일한 목적의식 속 깊은 유대감? 또는 공동체의식과 더불어 일종의 남자들만의 우정? 의리? 뭐 그런거 말이죠. 아! 뒤통수도 집어넣을까요?(누구를 위한 뒤통수인가...)
참고로 이 영화를 위해 쓰여진 음악은 거의 없는데요. 이는 음악대신 현실에 무게를 둔 음향과 훌륭하게 이어지는 롱테이크를 생각한다면 더없이 좋은 방법입니다. 특히 예민한 탐구(探究)방 식의 카메라는 등장인물들의 행동 하나 하나까지 지켜보면서(언뜻 필요없어도 될 정도로) 세심한 장면들이 그들과 보는 이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게끔 느끼게 해줍니다. 단언컨대 헐리우드식 빠른 템포와는 분명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게다가 영화 자체가 참으로 리얼하기까지 하죠. 이는 베케르 감독이 예전 장 르누아르 감독밑에서 일했던 영향이 컸기 때문일까요? 사회적 리얼리즘이나 뭔가 짝이 맞는 이야기 전개방식 등등 그의 특기할만한 사항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전 다른 건 몰라도 베케르 감독이 보여주는 인물들의 세밀한 묘사방식이 너무나 좋았어요. 물론 퍼펙트한 영화는 아니라서 개인적으로 몇몇 부분에 아쉬움을 느낍니다만 그 정도야 뭐 아무렇지 않습니다. 어쨌든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보길 바랍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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